갈릴레오의 천문학 업적

우주과학|2019. 6. 13. 18:07

갈릴레오는 정확하지 않은 망원경 작동에 불만을 품고 1609년에 네덜란드에서 만든 3배 망원경을 개량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발전시켜 30배율 망원경도 만들었다. 그는  발전된 망원경을 통해 정확한 관측을 했다. 


한동안 갈릴레오는 망원경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 1609년 8월 25일 그는 첫 망원경을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설명하였다. 그의 망원경 제작은 망원경이 무역업과 무역과 관련된 여러 일들에 있어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인들이 이용적당한 측선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1610년 3월에 갈릴레오는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그의 초기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학적 관측을 발표하였다.



1610년 1월 7일에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그가 당시 주장한 세 개 별 모두는 목성에서 일렬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너무 작아서 거의 볼 수 없는 세 개의 고정된 별들"에 대해 관찰하였다. 그리고 목성과 연관있는 "별들"의 위치가 만약 진짜로 고정된 별들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변한다는 것을 다음날의 관측을 통해 알았다. 1월 10일에 갈릴레오는 그 별들 중 하나가 사라졌음을 지적했고, 관측을 통해 갈릴레오는 사라진 별이 목성뒤로 숨은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며칠내로 갈릴레오는 그 별들이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갈릴레오는 목성의 3개 위성을 발견하였고, 이는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였다. 그는 또 다시 1월13일에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하였다. 갈릴레오는 이 4대 위성에 그의 미래의 후원자인 투스카니 공국의 군주 코시모 2세(Cosimo II de' medici)와 그의 세 형제를 기려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갈릴레오 자신을 기려 갈릴레이 위성이라고 새로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은 갈릴레오가 그런 별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갈릴레오 계속해서 관측을 진행했다. 그는 18개월에 걸쳐 위성을 관찰하였고, 1611년 중반에 그는 그 별의 주기에 대해 매우 정확한 측정을 하였다.


1610년 9월부터 갈릴레오는 달의 위상변화-달의 크기가 변하는 모습-과 유사한 금성의 위상 변화를 관찰하였다. 태양 중심 우주 모델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발전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미의 지구 중심 우주 모델과는 반대로 금성이 지구와 태양사이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면 태양은 금성에 밝은 반구면을 만들고 이는 금성이 태양의 반대편에 있을 때 관찰이 가능하고, 그리고 금성이 태양의 지구쪽에 있을 때 지구에서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금성의 모든 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예견하였다. 


반대로 프톨레미의 지구중심적 모델은 단지 금성의 초승달과 같은 위상만 관측이 가능하다고 예견하였다. 갈릴레오의 금성의 위상에 대한 관찰은 금성이 태양 주변을 돌고 있음을 증명하였고, 태양중심적 모델을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프톨레미의 지구중심적 행성 모델을 반박했기 때문에 여전히 갈릴레오의 관측이 매우 기괴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17세기의 대다수의 과학적 모임이 티코의 모델과 카펠라의 모델과 같은 지구 중심적인 모델로 전환하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공전하고, 이러한 태양을 주임으로 다른 별들이 공전하는 모델)


갈릴레오는 토성을 관찰하였고, 첫 번째에는 토성의 고리가 세 개의 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그 그가 나중에 토성을 관찰하였을 때, 그는 토성의 고리는 지구를 향해 나란히 있었고, 이는 갈릴레오가 두개의 고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1616년에 다시 토성을 관찰했을 때 그 고리가 다시 나타나서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1607년 케플러가 의도하지 않게 흑점을 발견하였지만, 그것을 수성의 변화로 착각했기에 갈릴레오가 유럽인 중 최초의 흑점 관측자가 되었다. 또한 갈릴레오는 이전에 수성의 변화로 간주되었던 샤를마뉴의 시대로부터 흑점의 관찰을 재해석했다. 


흑점의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천체물리학에 의해 확립된 천체의 변하지 않는 완벽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 우주 즉 천상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관점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흑점의 주기적인 변화는 지난 천체물리학의 성공적이고 놀라운 첫 번째 예측이 태양회전이라는 케플러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천체역학에 대한 추측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Francesco Sizzi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1612년에서 1613년에 밝혀진 흑점 운동의 연간 변화는 티코브라헤의 지구중심설과 천동설에 대한 주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계절적 변화는 태양이 매일 지구를 회전한다는 티코 브라헤의 지구중심적 모델과 같은 지구는 회전하지 않는다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행성모델을 반박한다. 이러한 것처럼 변화는 매일 일어나야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롱고몬타누스의 티코 브라헤의 지구중심모형을 절충한 것과 케플러의 확장된 지구중심모형이 주장하는 매일의 지구 공전과 태양중심적 모델과 함께 명백히 설명될 수 있다. 흑점의 발견에 있어서 우월성에 대한 논쟁과 그리고 그들의 해석은 갈릴레오를 예수회와의 불화를 이끌었다. 사실 케플러의 태양의 회전에 대한 예측을 공고히 하는 것을 발견하던 이들인 David Fabricius와 그의 아들 Johannes에 의해 격파되었다는데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었다.


갈릴레오는 달의 표면 위의 빛과 그림자의 패턴으로부터 알아낸 달의 산들과 분화구들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한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산의 높이를 이러한 관찰들로부터 계산해냈다. 이러한 것을 통해 그는 달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완벽한 구의 모양이라기보다는 지구의 표면과 같이 거칠고 편평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갈릴레오는 이전에는 불투명하다고 믿어졌던 은하수를 관찰하였고 너무 빽빽이 밀집되어 있어 지구로부터 구름 모양으로 나타나는 다수의 별무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너무 멀리있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많은 별들의 위치를 발견하기도 했다. 갈릴레오는 1612년 해왕성을 관찰했지만, 이것이 행성인지는 깨닫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특별한 인식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노트에서 표시될 수 없는 희미한 많은 별들 중의 하나로 나타나있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의 토대가 되는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확립했다. 이를 위해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통설로 밝혀졌다.


서로 다른 무게의 물건을 동시에 떨어뜨려도 거의 동시에 도착한다는 원리를 입증하고자 한 실험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거짓으로 밝힌 유명한 실험이다. 갈릴레이의 《신 과학의 대화》에 높이 100미터 정도 탑에서 포탄과 작은 총알을 떨어뜨려도 동시에 떨어진다는 설명은 있다. 그러나 그 "탑"이 어디였는지는 설명이 없다. 또한, 당시 공개 실험을 했다고 하지만 그 실험을 목격한 사람의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갈릴레이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갈릴레오가 피사에 살았다는 점, 비슷한 시기인 1587년에 네덜란드 물리학자 시몬 스테빈(Simon Stevin)이 자신의 집에서 비슷한 원리를 실험한 사실, 그리고 갈릴레오가 쓴 책 속의 설명을 엮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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