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을 이용한 갈릴레오의 발견

우주과학|2019. 6. 13. 17:28

망원경을 이용한 갈릴레오의 발견

달에도 산과 골짜기가 있음

별들이 아주 멀리 있음 - 연주 시차가 관측되지 않음

육안으로 보이는 별 사이에 무수히 많은 별이 있음

은하수는 별의 모임

목성의 네 위성 발견

토성의 옆에 다른 별이 붙어 있음(토성 고리 인지)

금성의 모양이 달라짐

태양에는 흑점이 있고 흑점의 모양은 계속 변함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혁명, 지식의 출발점이 되다

망원경을이용한 자신의 발견들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는 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역학적인 문제들을 연구했고, 그 결과를 1632년에 출판한 책 '세계의 두 체계에 관한 대화'에 담았다.


'대화'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실비아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심플리치오,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보는 사그레도, 세사람이 4일 동안 지구의 공전을 포함한 여러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세사람은 첫째 날에는 달의 생김새와같은 천문학적 현상을, 둘째 날에는 밀물과 썰물, 즉 조석 현상을 다룬다. 이 중에서 갈릴레오가 가장 중욯게 여겼던 주제는 조석 현상이었다. 


갈릴레오가 일찍부터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수용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조석현상 이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있다면, 조석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화'에서 갈릴레오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 차이,그리고 관성 개념을 이용해 조석 현상을 설명했다.


갈릴레오는 '대화'의 도입부에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수학적 사설로만 다룰것이고, 두 체계의 장단점을 공정하게 논하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애초의 약속과 달리이 책은 눈에 띄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대화'는  불온서적 혐의를 받고 금서 목록에 포함되고 말았다. 다음 해 1633년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고, 가택 연금형에 처했따. 그리고 갈릴레오에 대한 메대치가의 후원도 끊겼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천문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망원경이 가져다준 천문학 자료는 이전 세대의 육안 관측 자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갈릴레오가 활동하던 과학 혁명 시기에는 이처럼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데 새로운 도구들이 큰 역할을 했다. 가릴레오의 망원경은 신이 만든 우주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새로운 과학 도구였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게 된다. 17세기 말에는 대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프롤레마이오스 천문학, 퇴코 브라헤의 천문학,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나란히 가르칠 정도로 코페르니쿠스의 권위가 상승했다. 아리스토텔레스 -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보수성을 상징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은 변혁과 근대정신의 상징이 되어 갔다. 마침내 18세기 이르면 대학교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 체계만을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 의심을 품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들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관측 자료들은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 -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틀렸음은 명확하게 증명했다. 후대 천문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자료를 바탕으로 고대부터 이어져 왔던 우주론을 부정하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수용했다. 이들은 갈릴레오보다도 더욱더 정확한 자료를 이용해 우주의 비밀에 다가서고자 노력했고, 지금도 그러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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